1. 바이올린 / 나폴리아 / 코렐리 곡 / 이예림 연주
2. 첼로 / 소나타 다 장조 / 브레발 곡 / 이예진 연주
3. 피아노 / 목마른 사슴 / 이예림 연주
4. 피아노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이예진 연주
5. 중창 / 예수께로 가면 / 이예진, 이예림 노래

가족 음악회를 열어 봤습니다.
실수는 많았지만 즐거운 음악회였습니다.

계시록 13장 16절에 보면 땅에서 나온 짐승은 모든 자들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여기에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할 것 없이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시자 사단도 따라서 자기 종들의 이마에 낙인을 찍도록 합니다. 이 짐승의 표는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는 장식품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곧 그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을 나타내는 숫자로 표가 찍힌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팔거나 사거나 할 수 없습니다. 이 표가 없으면 정상적인 경제 생활, 사회 생활을 할 수 없도록 사회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설령 짐승에게 경배할 마음이 없다 할지라도, 다만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그 표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다른 사람과 내가 가진 자원을 서로 교환하지 않고 혼자 힘으로 살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짐승은 표를 매개체로 해서 성도들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고 배제시켜 버려서 결국 극심한 고통을 빠트립니다. 여기서 이 표에 적혀 있다는 육백육십육이라는 숫자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동안 이 숫자가 바코드라는 설이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 말세에 모든 사람들의 이마나 손목에 생체 인식용 바코드를 이식하게 될 것이고, 이 바코드가 없으면 전자 결제를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이 바코드의 숫자가 666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론의 치명적인 약점은 누구나 다 666이란 코드를 받으면 서로 식별이 안 되기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서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요즘은 바코드 시스템에서 무선으로 동작하는 RFID 시스템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기 때문에 이 이론은 곧 폐기 처분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이마에 인치신 표가 내적이고 상징적인 것처럼, 이 666이라는 표도 내적이고 상징적인 것입니다. 이 표가 우리 시대 외적으로 나타나면 뇌물과 청탁으로 일을 해결하려는 뿌리 깊은 관습, 오직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재테크 열풍, 혼전 순결을 가볍게 취급하는 문란한 성문화 등등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대열에 같이 끼지 않으면 출세길이 막히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기도 하고 바보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짐승의 표를 받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장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거부하시겠습니까?
출애굽기 21장 5절, 6절에 다음과 같은 규정이 있습니다.

"만일 종이 분명히 말하기를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상전을 섬기리라"

율법에는 종이 육 년 동안을 섬긴 후 제 년에는 자유를 주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규례에서 특별한 것은 스스로 해방되기를 거부하는 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주인을 너무 사랑해서 둘째는 처자를 너무 사랑해서, 주인이 아내를 주었을 경우 스스로 계속 종이 되길 소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종살이 도중 결혼한 처자는 주인에게 소유권이 있어 함께 데리고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 선택은 전적으로 본인의 자유에 속했습니다. 처자를 사랑해서 이런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수긍이 갑니다. 그런데 주인을 사랑해서 자유를 뿌리치고 스스로 종이 되기를 원한다니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그러면 이런 선택을 받은 그 주인은 어떤 주인일까요? 그 주인은 분명 인자하고 자비로운 주인일 것입니다. 그는 공의롭고 만사를 공평하게 다루는 주인일 것입니다. 그 주인은 노예를 노예를 여기지 않고 친 자식처럼 형제처럼 아끼는 주인일 것입니다.

종이 이렇게 영원히 종이 되길 원하는 경우 재판장에게 가서 문에 귀를 대고 송곳으로 귀를 뚫도록 했습니다. 귀를 뚫는다는 것은 영원한 예속을 상징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대에서 "말뚝 박기"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말뚝을 박는다는 것은 군대에 장기 복무 지원하는 것을 말합니다. 군에서 다른 건 강요하지만 장기 복무 선택만큼은 본인의 자유에 맡깁니다. 다들 말뚝 박기를 극도로 싫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 중에 군대가 좋아서 장기 복무를 신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기 복무를 지원하기 전과 후는 군인이란 점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그 신분에 있어서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지원 전에는 의무 복무 군인이었나 지원 후에는 자원하여 복무하는 군인 즉 직업 군인이 됩니다. 귀를 뚫기 전이나 후나 종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귀를 뚫은 후에는 본질적으로 다른 종이 됩니다. 의무에 의한 종이 아니라 자원하는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유 가운데 스스로 속박되기를 결정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원하는 종의 동기는 무엇입니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사랑은 자유를 기꺼이 자유를 포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은 종이 되기를 기뻐하도록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의무에 의한 종은 6년이라는 의무 복무 기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원하는 종은 그 상전을 종신토록 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 장에서 자신을 종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빚을 진 자였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인생이 파산했습니다. 갚기는 커녕 날마다 그 채무가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나를 값 주고 사셨습니다. 내 대신 댓가를 지불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어린 양의 보혈로서 나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값 주고 사오신 종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의무가 있는 종입니다. 고린도 전서 6장 19b,20는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그러나 여기에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또한 자원하는 종입니다. 주인을 사랑하기 때문에 처자를 사랑하기 때문에 귀 뚫은 종이 된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종이 되기를 자청한 사람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뚫은 종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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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관계는 언제나 상호적입니다.
어떤 영역에서든 일방적인 관계는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기 위해 일대일 성경 공부을 하고, 메시지를 듣고, 일용할 양식을 먹습니다.
반면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찬양과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나에게 나아와 찬양하라,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로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상호적이 되고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
찬양, 기도는 무엇을 준비하는 단계가 아니라
찬양은 찬양이며 기도는 기도입니다.
기도와 찬양 시간은 우리 속에 있는 것들, 표현되지 않으면 죽어 버렸을 것, 막혀 버렸을 것들을 끄집어 내어서 하나님께 아뢰는 시간들입니다.
그것들은 주님께 대한 사랑 고백, 감사, 찬송, 나의 소원을 간절히 아뢰는 탄원, 죄의 고백, 때로는 불평과 원망까지 포함합니다.
우리에게 꼭 하나님께 아뢰고 싶은 말들이 있었고, 주님께 올려 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에 기도와 찬양 시간은 소중합니다.
그 동안 주님께 드린 노래와 고백과 기도가 많았고 지금도 많지만 돌이켜 보니 주님께 드릴 말씀은 이것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예요.

 

우리 집 귀염둥이 셋째 예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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