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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에 해당하는 글들
- 2007/11/22 행복 헌장 5 계명
- 2007/08/19 변형되신 예수님
- 2007/07/25 정죄치 않으신 예수님
- 2007/07/25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 2007/05/27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행복 헌장 5 계명
말씀 : 창세기 2:4-25
요절 : 창세기 2:8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요즘 우리 사회 최대의 이슈는 이제 앞으로 한 달 남짓 남은 대통령 선거가 아닐까 합니다. 각 후보들마다 국민의 표를 한 표로 더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정동영 후보는 행복 배달부로서 행복 바람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며 가족 행복 위원회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권영길 후보는 여전히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명박 씨는 국민 성공 시대를 만들겠다고 하는데 이 역시 국민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늘 서로 치고 받는 대선 후보들이지만 그들 모두가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바가 행복이라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바라는 바라는 행복, 사람들은 그 행복의 조건이 무엇이라 여기고 있습니까?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면 행복해 질 것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티브이에서 로또 광고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갑자기 눈이 동그레지면서 입에 귀에 걸리고 두 팔을 번쩍 들고 껑충 껑충 뛰는 사람을 보셨을 것입니다. 바로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된 사람입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나도 저사람처럼 돈방석에 앉고 싶다는 소망을 안고 복권 용지에 싸인펜을 칠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벌어서 외제 승용차도 사고 타워 팰리스 같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면 마냥 행복해 질 것만 같습니다.
또한 요즘 시대를 가리켜 웰빙 시대라고도 합니다. 이젠 단순히 부자되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습니다. 부자되느라고 죽도록 고생만 하다가 건강을 해쳐 일찍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어도 아무 음식이나 먹지 않고 웰빙 푸드를 골라서 먹고, 몸에 좋다는 것은 가리지 않고 뭐든지 열심히 합니다. 잘 먹고 잘 살기 경쟁이라도 붙은 것 같습니다. 심지어 제 회사 옆에 대표적인 비웰빙 정크푸드인 튀김과 라면, 햄버거를 파는 분식집이 있는데 이름이 웰빙 스넥바입니다. 그러고 보니 거의 모든 웰빙 상품들의 가격이 무척 비싸기 때문에 우선은 부자가 되어야 웰빙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공은 곧 행복이라는 등식도 있습니다. 성공해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고 우러러 본다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습니까? 서점가에서는 빌 게이츠나 오프라 윈프리 같은 사람들의 성공 비결을 담은 책들이 불티나게 팔립니다. 성공하기 위해 인맥도 쌓고 성공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성공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합니다.
그런데 실상 행복은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모두 부러워할만한 행복의 조건을 갖추었지만 전혀 행복하지 않은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삼성 그룹 이건희 회장의 막내딸 윤형씨가 재작년 이맘때 미국에서 26살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쳤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고, 그녀가 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또한 USA 투데이는 역사상 최고액의 복권에 당첨된 잭 위디커의 삶을 추적한 기사를 특집으로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잭 위디커는 2002년 크리스마스 저녁 복권에 당첨되어 세금을 제외하고 1억 1400만 달러(당시 환율로 약 1183억원)란 엄청난 돈을 일시불로 받았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그 후 일년 동안 위디커는 총 5 차례 도난 사건을 당했으며, 두 차례 음주 운전 사고로 면허를 박탈당했으며 , 불법 무기 소지 혐의로 1번, 성추행 혐의로 1번, 폭행과 협박 혐의로 1번 경찰에 체포되고 검찰에 의해 2번 기소되었으며, 손녀딸의 친구가 자신의 저택에서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고, 얼마 후 그 손녀딸마저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잭 위디커의 삶은 복권 당첨 뒤 일년도 안 되어 엉망진창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사상 최대의 복권 당첨은 그에게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의 씨앗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젠 이런 질문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일까요? 아니면 스위스일까요? 런던정경대학이 조사한 전세계 54개국에 대한 행복 지수 조사결과에 따르면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가 1,2,3 위를 차지했으며 미국과 스위스는 40위권이었습니다.(한국은 23위) 방글라데시, 아제르바이잔, 나이지리아, 이 세 나라들의 공통점은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들이라는 점입니다. 여러분은 이 결과들 앞에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어쩌면 행복은 알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알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행복은 잡힐 듯 잡힐 듯 하지만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나 무지개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버드대 심리학 교수인 대니얼 길버트는 인류는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토마스 모어는 모든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이상향을 가리켜 ‘유토피아’ 즉 ‘결코 존재하지 않는 땅’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 답이 바로 창세기 2 장에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천지창조의 웅장한 서곡이라면 창세기 2장은 특별히 인간 창조에 관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습니다. 창조된 인간이 최초로 거주하였던 곳이 그 유명한 에덴 동산입니다. 에덴이란 기쁨 또는 희락이란 뜻입니다. 에덴 안에는 행복의 원형이 들어 있습니다. 에덴 안에는 인생의 행복의 비결이 담겨져 있습니다.
2005년 영국 BBC 방송에서 “행복”이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행복 헌장 10 계명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소개해 보면 ... 운동을 하라. 일주일에 3회, 30분이면 충분하다’’,‘TV 시청 시간을 반으로 줄이라’, ‘식물을 가꾸라. 아주 작은 화분도 좋다. 죽이지만 말라~!’헌장치고는 너무 시시한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웬지 믿음이 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세기 2장에서 확실한 행복의 다섯 가지 조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 가르쳐 주는 행복 헌장 5 계명의 세계로 빠져~ 봅시다.
첫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흙은 부드럽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흙으로 지음받은 인간의 육체는 연약합니다. 한창 젊을 때는 자기 몸이 강철인줄 착각하지만 제 나이만 되도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릅니다. 건강할 때는 잘 모르지만 한번 아프기 시작하면 내 몸이 흙으로 지어진 줄으로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19절에 보면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도 흙으로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육체적으로 보면 인간이나 짐승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찌나 비슷한지 돼지의 장기를 인간에게 이식하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생물과는 결정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시기 전에는 인간은 그저 몸뚱아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운이 인간의 육체 속에 들어왔을 때 인간은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는 살아있는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인간 생명의 수여자요 공급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하나님께 결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파괴되면 인간은 그저 다시 몸뚱아리가 되고 맙니다.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죽은 자는 행복을 느낄 수도 없고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까? 성경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높고 고상하고 활력에 찬 영적, 도덕적 생명입니다. 식물이 물이 없어서 말라 죽어가다가 생수가 공급될 때 살아나는 것과 같이, 살았으나 죽은 상태에 있다가 예수님의 생명에 접하게 되면 생명이 소생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생명을 누리는 사람은 그 내면에 영생의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 생명을 누리는 자에게는 세상 만물이 새롭게 보이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찼음을 깨닫게됩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에덴 동산에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온통 회색입니다. 건물도 회색이고 거리도 회색이고 자동차도 회색이고 하늘마저 회색입니다. 그러나 에덴에는 넓고 푸른 풀밭이 융단처럼 깔려 있었고 초록빛 나무잎 사이로 붉고 탐스러운 과실이 곧 떨어질 듯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푸르고 맑은 강물이 에덴에서부터 흘러 나와 동산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물은 모든 생명체의 젖줄입니다. 에덴에서 갈라진 물줄기는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 이렇게 네 개의 강을 이루었습니다. 강가의 돌들이 온통 순금이거나 베델리엄과 호마노와 같은 보석들이었습니다. 아담은 비손 강가에서 순금 덩어리로 물수제비를 뜨면서 놀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아담에게 다만 은혜로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서 에덴 동산 거주에 따르는 보증금이나 임대료를 전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시되 후히 주시어 넘치도록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이 은혜와 축복을 잘 받아서 누리면 됩니다. 만약 아담이 하나님께서 에덴으로 이끄실 때 ‘왜 이러십니까? 저를 도대체 어디로 데려가시는 겁니까?’하면서 불신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행복은 커녕 안개만 자욱한 황무지에서 풀 뜯어 먹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고 따르시길 바랍니다. 황무지 같았던 우리 인생에 장미꽃이 피어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하나님은 사람이 에덴동산의 축복을 마음껏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특별히 먹는 문제에 관해서 일절 간섭치 않으시고 모든 과일을 임의로 먹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됩니다. 이것은 거의 무한대한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자유를 인간에게 주셨을까요? 니콜 키드먼이 여주인공으로 나오는 스텝포드 와이프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부부가 스텝포드라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사한지 얼마 안 되어 이상한 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스텝포드 마을의 아내들이 너무나 완벽 말그대로 Perfect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아내들이 못하는 요리가 없고 남편에게 순종적이며 늘 웃는 얼굴로 대합니다. 사실 그 마을은 엄청난 비밀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마을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에 의해 인조인간로 개조된 로보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니콜 키드먼의 남편은 아내를 인조인간으로 개조하기를 거부하고 마을의 비밀을 폭로해 버립니다. 왜 그는 자신의 아내를 완벽한 아내로 만들기를 거부했겠습니까? 이는 그가 아내로부터 자발적으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사랑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인격적인 존재로 만드시고 인간이 자율적으로 기쁨과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담이 자신의 선택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자유가 있었다면 그는 분명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하심으로 도덕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할 위험마저도 감수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자유를 주시되 동시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도록 명하셨습니다. 여기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볼 때 이것은 계명의 나무 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때 인간은 반드시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시면 동산 중앙에 왜 이런 선악나무를 두셨는가, 왜 이것을 두셔서 죄를 짓게 만들었는가, 꼭 만들어야했는가 하는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은 알아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신 까닭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 선악나무를 통하여 다만 하나님과 인간과의 분명한 질서를 세우기 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선악나무를 통해 인간이 무한한 자유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만약 에덴동산에 선악 나무가 없었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에덴은 맹맹하고 맛없는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가 없으면 인간은 그 많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은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때는 더 이상 그 에덴의 축복은 축복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 되어버리고 기쁨이 사라집니다. 자기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은 우리를 영적인 존재로 빚어가며 우리 마음에 만족을 줍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기쁨을 줍니다. 인간은 그렇게 지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계명을 떠나 함부로 살고자 하면 자유롭게 잘 살 것 같지만 우리 마음은 이내 허전하고 곤고하며 방향감각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계명은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계명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있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가 있게 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 계명은 축복과 영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을 인격적으로 지으시고 무한한 자유를 주시되 계명의 나무을 세우신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가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담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에덴 동산을 관리할 청지기로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놀고 먹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무 할 일도 없이 계속 놀고 먹어 보십시오. 곧 미쳐 버리고 말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가난도 병도 아니다. 그것은 생에 대한 권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19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각 생물의 이름을 짓도록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름 짓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름 짓기는 만든 사람의 고유 권한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이름을 짓도록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한을 아담에게 위임하셨다는 뜻입니다. 사명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하신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우리 인간과 함께 동역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자께서 이 작고 연약한 인간과 함께 일하기를 원하신다니요? 이 일만큼 영광스럽고 의미있고 값진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우리를 인간답게 하고 우리 삶에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해 줄 것입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세우신 가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인간은 혼자 살면 좋지 않습니다. 외롭습니다. 인간은 교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팔을 걷어 붙이시고 아담을 위해 돕는 베필을 지으셨습니다. 지으시되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지으셨습니다. 아담은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소감 발표하였습니다. 이로서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가정이 이루어졌습니다. 결혼이란 무엇입니까? 서로 눈이 맞아 함께 사는 것이 결혼이 아닙니다. 결혼은 신성한 언약입니다. 오늘날 깨어진 가정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행한 삶을 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원인이 바로 인본주의로 말미암아 결혼에서 그 핵심인 신성함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마음대로 만나고 마음대로 헤어지는 가운데 남편과 아내는 물론이요 자녀들은 씻기 어려운 큰 상처를 받습니다. 가정이 회복되어야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가정의 회복이란 창세기적인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가정을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에덴 동산을 창설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나의 행복에 무엇이 필요한지 가장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한 채 자신만의 낙원을 건설하려 했었지만 모두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시도들이 더 큰 비극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습니다.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라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틈 많은 해골들이 묻힌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 유학까지했던 지성인인 폴 포트라는 사람이 캄보디아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습에 물든 기성세대를 몰아내야 한다며 무차별 살육을 벌인 곳입니다. 칼 맑스는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철폐하면 낙원과 같은 공산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결과는 스탈린의 시베리아 강제수용소였습니다. 그의 문제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잘 몰랐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간이 흙이라는 물질로만 지어진 줄로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을 배제한 채 행복을 약속하는 많은 주장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심리학일 수도 있고 처세술일수도 있고 과학기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창조된 인간의 본질은 변함이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나를 가장 잘 아십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만이 나의 행복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에 대한 완전한 행복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나보다도 더 나의 행복에 관심을 기울이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에덴 동산을 만드신 분도, 사람을 에덴으로 이끄신 분도, 독처하는 아담에게 돕는 베필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이십니다. 아담이 먼저 요구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마지 못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보다 먼저 아담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시고 필요한 모든 것들을 채워주셨습니다. 심지어 내가 스스로 나의 행복을 포기하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기쁨의 동산으로 이끌기 원하십니다. 그 어느 누구도 불행해지기 위해 창조된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 버린 낙원을 인간에게 되돌려 주시고자 하는 열심을 품고 계십니다. 죄로 인해 망가질 대로 망가져 버린 온 세상을 창조 시의 아름답고 완전한 세상으로 회복시키고자 하시는 거룩한 열망을 품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우리가 순종하고 예배해야 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는 막가도 되는 사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 창조주의 뜻을 거스른다거나 창조주를 주로 인정하지 않을 때 그 피조물은 창조주에게 아무런 존재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창조의 마지막 걸작품인 아담으로부터 순종의 제사를 받으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계명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지극히 높으신 분으로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결론적으로 행복 오계명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함께 따라해 봅시다. Life, Blessing, Bible, Mission, Home in God. 우리 말로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명, 축복, 말씀, 사명, 가정 여기서 in God 즉 하나님 안에서가 대전제입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성을 맺고 있을 때 우리 삶에는 생명과 축복이 넘치고, 말씀과 사명을 붙들면서 세상을 승리하며, 아울러 가정의 행복이 깃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에덴을 회복하고 참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변형되신 예수님
▣ 말씀 / 마가복음 9:1-29
▣ 요절 / 마가복음 9: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는 변화산 상에서 변형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건을 말합니다.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을까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부른 제자들이었으며 항상 예수님과 함께 다닌 핵심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시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되는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했을 때 보게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세 명의 핵심 제자들에게만 변형되신 모습을 보여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하였습니다. 그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님과 말을 나누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엘리야와 모세입니까? 이 두 사람은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나타난 것은 고난 끝에 영광이 있음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고난을 앞둔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대답하여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사실, 베드로는 무슨 대답을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이 말을 한 것은 엉겹결에 한 말으로 그의 무의식적인 소망을 잘 말해 줍니다. 베드로는 문제 많고 사고 많은 산 아래로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산 위에서 초막을 짓고 신선처럼 유유자적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변형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아직도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기를 거부하고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구름이 일어나서, 그들을 뒤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 그들이 바로 둘러보았으나, 아무도 없었고, 예수님만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임하셔서 말씀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 특히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가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가 그리고 왜 반드시 순종해야 할 말씀인가 그러면서도 이 말씀에 순종하기가 얼마나 쉽지 않은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른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고, 율법학자들이 그들과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서는 몹시 놀라, 달려와서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그들과 무슨 논쟁을 하고 있느냐?" 무리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습니다.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 제자들의 무능으로 인해 논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세대를 인하여 탄식하셨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에는 무능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이 모두 포함됩니다. 제자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다른 점이 많았지만 믿음이 없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불신은 무능을 낳고 무능은 논쟁을 낳습니다. 그들이 아이를 예수께 데려왔습니다. 귀신이 예수를 보자, 아이에게 즉시 심한 경련을 일으켰습니다. 아이는 땅에 넘어져서, 거품을 흘리면서 뒹굴었습니다. 귀신은 아이의 상태를 더욱 나빠지게 함으로서 불신과 회의를 심고자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만 물으셨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대답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귀신이 그 아이를 죽이려고, 여러 번, 불 속에도 던지고, 물 속에도 던졌습니다. 하실 수 있으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십시오." 어릴 적부터 귀신에게 시달림을 받아 온 이 아이는 참으로 불쌍합니다. 또 그런 아이를 곁에서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심정이야 오죽했겠습니까? 아비는 믿음으로 제자들에게 나아왔지만 제자들은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자 아이의 상태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가 처음 가졌던 믿음이 시험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할 수 있거든 이란 조건은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할 수 있거든은 한계와 제약 조건을 지닐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분이 이 땅에 오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믿는 자가 유능해서가 아닙니다. 믿는 자가 의지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이에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 하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신앙 고백입니다. 현재 조건과 환경이 어찌하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겠다는 결단입니다. 동시에 그는 말했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믿음마저도 주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생겨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믿음 없음을 인정하고 믿음을 주시도록 간절하게 주님께 구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가 떼를 지어서 달려오는 것을 보시고, 악한 귀신을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 하셨습니다. 그러자 귀신은 소리를 지르고 아이에게 심한 경련을 일으켜 놓고서 나갔습니다. 아이는 죽은 것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말하기를 "아이가 죽었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서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섰습니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내쫓지 못했습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 제자들이 무능하게 된 까닭은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과거 경험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둘 씩 짝지어 나가 곧곧에서 귀신을 내어 쫗쫓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제자들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 사실을 잊어 버리고 자신을 의지했기 때문에 실패했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이 생기기 않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길은 바로 믿음과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정죄치 않으신 예수님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시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의 머리채를 붙잡고 질질 끌며 들어 왔습니다. 여인의 긴 머리털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고 옷은 먼지 투성이였습니다. 여인은 겁에 질린 창백한 얼굴로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간음 중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간음한 남자와 여자는 모두 돌로 쳐 죽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간음을 이토록 무겁게 처벌하는 까닭은 간음이 한 가정을 파괴시키며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치명적인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도 이러한 율법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왜 간음을 저질렀을까요? 여인은 자기는 들키지 않을 줄로 믿었을 것입니다. 또한 앞 뒤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충동에 이끌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처럼 죄의 충동은 강력합니다. 심지어 죽을 줄 알면서도 저지를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 죄의 소욕입니다. 인간의 의지로 혹은 이성으로 죄의 충동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 중 한 사람이 나서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 그들이 이러한 질문은 하는 것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만약 여기서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 하신다면 살인교사죄에 해당하여 로마법에 의거하여 고소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만약 반대로 예수님께서 돌로 치지 말라 하신다면 모세의 율법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것이 되어 종교법에 의해 고소할 조건이 되었습니다. 돌로 치라 할 수도 없고 치지 말라 할 수도 없으니 첩첩산중, 진퇴 양난, 사면초가였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무리들은 저마다 한 손을 든 채 여인을 손가락질하며 욕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예수님의 답변을 재촉하였습니다. 한 동안 침묵하시며 땅 바닥에 글씨를 쓰시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이 떨어지자 마자 소란하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기세 등등하던 사람들의 얼굴에서 침통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돌을 들었던 손에 힘이 스스로 풀렸습니다. 여기서 저기서 땅 바닥에 돌이 구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에 이르기까지 모두 등을 돌려서 빠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고소하려던 이들마저도 자리를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을 잡으려고 교묘하게 파 놓은 덫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여인만이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물으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정죄란 죄를 정한다는 뜻입니다. 곧 죄에 대한 심판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죄하는 그 사람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동일한 죄를 짓고도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죄를 범하는 순간 자격 상실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남에게만 적용하라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기준을 자신에게 적용하게 되면 나 역시 다른 사람과 꼭같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떠 났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점을 암시합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에게서 물려 받은 원죄와 스스로 지은 죄로 인해 죄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만족시키지 못 했습니다. 인간 상호 간에 조금 죄를 덜 지은 죄인과 더 많이 지은 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오십보 백보요 다 똑 같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는 죄인일 뿐입니다. 박효진 장로가 증거하셨듯이 흉악한 범죄자나 선령한 시민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죄인을 심판할 자격을 갖춘 사람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바로 죄 없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심판할 자격을 갖춘 유일한 분이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유일하게 정죄할 수 자격을 갖춘 그분께서 너를 정죄하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시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죄의 용서는 댓가 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벌을 이 여인을 대신하여 자기 몸에 받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한 여인이 받아야 할 사형 선고를 대신 자신이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간음한 여인 뿐 아니라 모든 인류 바로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라
버림 받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참칭하였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고발한 죄목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살기를 바라신다면 이 질문을 부인하시거나 최소한 묵비권을 행사하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진리를 부정하거나 숨기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신을 위해 변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고발 사유를 순순히 인정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빌라도는 타고난 정치적 감각을 발휘하여 예수님이 무죄라는 것을 알아 차릴 수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고발 당한 진짜 이유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시기심이 그 원인이라는 것까지도 간파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빌라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예수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즉시 방면해야 합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척을 두거나 백성들의 소요 사태를 야기시킬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신 줄 알면서도 유죄 평결을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축소판입니다. 법과 윤리와 도덕이 있으나 이는 지켜지지 않습니다. 정의가 이루어져야 할 법정에서 무죄한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고 살인 강도가 사면을 받아 풀려 납니다. 가장 순수하고 거룩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의인을 죽이고자 합니다. 그 아무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 보지 못합니다. 모두가 눈이 멀었습니다. 주님은 사랑에 눈이 머셨건만 우리는 죄악에 눈이 멀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120대나 되는 채찍에 맞으셔야 했습니다. 채찍질에 온 몸이 패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육체적인 고난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은 왕이 입는 자색 옷을 입히고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가시가 밖힌 머리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었습니다. 군인들에게 예수님은 잠깐 가지고 놀다가 쓰레기통에 버려질 장난감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의 몸과 마음은 짓밟힌 장미꽃과 같이 되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일개 군병 몇 사람들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시다니요?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찌하여 아들의 이 고통에 침묵하고 계신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욕과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파하셨습니다. 전혀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 스스로 인간이 겪는 고난과 아픔의 현장 한 가운데로 들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일들이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이는 우리의 이해를 뛰어 넘는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예수님과 3년을 동고 동락했던 제자들마저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모두 뿔뿔히 흩어졌습니다. 다만 믿음으로 예수님이 가신 고난을 바라볼 때 놀라운 치유가 일어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으로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우리를 낫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 모든 수치와 고난 멸시의 길을 묵묵히 걸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된 심문과 채찍질에 지칠대로 지치셨습니다. 자비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로마 군병마저도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는지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구레네 사람 시몬이 대신 지도록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강도 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은 강도들과 동일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굵은 대못이 예수님의 손과 발목에 박혔습니다. 못 박힌 자리에서는 피가 흘러 나왔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예수님은 그렇게 십자가에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극한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채찍질도 군병들의 조롱도 십자가 형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버림 받는 고통이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 아버지는 이 순간 예수님의 기도에 아무 응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의 간절한 외침을 아버지는 외면하셨습니다. 세례를 받으실 때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던 그 아버지께서, 새벽 미명에 나가 기도할 때마다 따듯한 음성으로 맞이하셨던 그 아버지께서 제자들과 양무리들에게서까지 버림받고 가장 아버지의 음성을 애타게 구하는 이 순간 침묵하셨습니다. 그 고통의 깊이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아버지께 버림받으셔야 했습니까? 하나님께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죄악으로 깊이 물든 우리를 외면하시고 내치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자신이 버림 받으심으로 우리가 버림받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누리게 된 축복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는 순간 성소의 휘장이 둘로 갈라져 찢어졌습니다. 이는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막힌 담이 허물어졌음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 사건을 결에서 지켜보던 이방인인 백부장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 말씀 : 마가복음 4:21-34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이어 말씀을 대하는 사람의 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째, 말씀은 어두움 가운데 드러나 빛을 발합니다.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상은어둡습니다. 세상이 어두워 사람들은 갈 바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어두워 내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세상이 어두워 진리를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세상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 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빛은 곧 말씀입니다. 말씀은 빛입니다. 말씀이 드러나면서 세상은 밝아집니다. 말씀은 세상의 참 모습을 일깨워 줍니다. 말씀은 내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할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말씀은 진리의 빛으로서 세상이 실존하는 모습 그대로를 인지하도록 해 줍니다.빛은 인격입니다. 인격이신 예수님 안에 생명의 빛이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요한복음 1장) 말씀은 빛으로 둘러싸인 우리의 아버지에게 인도합니다. 말씀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사람들에게 일시적으로 감추어지고 숨겨진 듯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추고 숨기려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결국에는 드러내고 나타내는 것이 목적입니다. 어두운 시대일수록 말씀은 더욱 그 빛을 발합니다. 이 시대는 과학과 인본주의의 시대입니다. 이 시대에 말씀은 감추어지고 숨겨진 듯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들을 누르고 온 천지에 그 찬란한 영광의 빛을 비추일 것입니다.
둘 째, 말씀은 말씀을 헤아리는 사람에게 드러납니다.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말씀은 무엇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계속 감추어져 있고 어떤 사람에게 드러날까요? 그 차이는 헤아리느냐 헤아리지 않느냐에서 옵니다. 말씀을 듣고 헤아리는 사람에게는 말씀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헤아리지 않는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헤아린다는 말은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말씀은 들음으로 끝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들음과 묵상이 함께 합니다. 들음 만 있고 묵상이 없으면 말씀은 감추어지고 숨겨진 채로 남아 있습니다. 무수한 헤아림 속에서 말씀은 조금씩 조금씩 그 껍질을 벗습니다. 그와 동시에 말씀에서 발하는 광채가 우리의 마음을 비추고 더 나아가 세상을 비춥니다. 말씀은 얼마나 깊은지 아무리 헤아리고 또 헤아려도 그 끝을 만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비유의 말씀은 동일하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 말씀으로 인해 삶이 변화되고 그의 존재가 새롭게 되는 이는 언제나 소수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헤아리는 자들입니다. 헤아리는 자는 점점 더 깊은 말씀의 빛으로 헤아리지 않는 자는 들은 말씀마저 안개처럼 흩어지고 맙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씨를 땅에 뿌림과 겨자씨에 비유하셨습니다.
첫 째,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성장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씨는 그 자체로 생명의 모든 가능성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땅은 씨가 열매를 맺기까지 자라는 데 필요한 양분과 수분을 어머니처럼 공급합니다. 씨를 뿌린 사람은 그저 밤 낮 자고 깨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자체로서 성장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키우고 이루어가십니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 나라의 씨앗인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말씀은 곧 사람의 마음 안에서세력을 얻어 스스로 성장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누구도 그 과정을 다 알지 못합니다. 이는 생명의 신비요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또한 씨가 뿌려져서 열매를 맺기까지는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 이삭에 충실한 곡식입니다. 씨는 단계를 건너 뛰 어 자랄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단숨에 씨앗에서 열매가 맺히지 못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점진적인 성장의 단계을 거칩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자에게 열매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둘 째, 하나님의 나라는 작게 시작하여 크게 성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후에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만큼 큰 나물로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겨자씨가 곧 하나님 나라의 시작입니다. 한 사람에게 전한 전도 한 마디 속에 천하를 변화시킬 씨앗이 들어 있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 있는 작은 공동체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작은 것으로부터 공중의 새가 깃들이는 큰 나물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습니까? 믿음이 이를 가능케 합니다. 믿음은 현재 겨자씨처럼 작은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통해 장차 이루어질 우주적인 종말의 때를 기대하고 소망하게 합니다.